천관산에 핀 한송이 연꽃
- 작성일
- 2004.11.23 14:28
- 등록자
- 아OO
- 조회수
- 1945
"선행이요? 삶의 화두를 늘 실천했을 뿐이죠"
28회 청백봉사상 받은 이점심 보건주사보
고아 2명 입양 양육, 20년간 독거노인ㆍ장애인 방문 봉사
공무원공제 해약 장흥 묘덕사에 불사금 3천만원 보시
93년 봄까지 아줌마로 불렸다. 아니, 호칭은 '저기요~'였다. 그렇게 눈치만 보던 9ㆍ11살 아이들이 아침밥을 차리고 있을 때 '엄마'라고 불렀다. 1년 만이었다. 순간 기뻤다. '이제야 진짜 내 자식으로 돌아왔구나.' 아이들을 왈칵 끌어안았다.
11월 20일, 전남 장흥군보건소 관산지소에서 만난 이점심 씨(51ㆍ선덕행). 입양한 두 딸을 16년 넘게 기르면서 살아온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두 아이를 집으로 데려온 건 지난 92년이었어요. 그해 아이들의 친부모들은 잇따라 세상을 떠났지요. 의지할 곳 없는 아이들을 대신해 장례를 치러줬죠. 그런데 식이 끝난 뒤에 아이들을 두고 돌아서는 마음이 내내 무거웠어요. 아이들이 눈에 밟혀 사흘 밤을 뒤척였죠. 고민 끝에 목포에서 일하던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들을 우리가 데려다 키우면 안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남편이 흔쾌히 허락을 하더라고요."
이 씨는 5일 만에 무작정 아이들을 데려왔다. 하지만 막막했다. 시댁 어른의 눈총과 친 아들 둘과의 다툼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어머니는 남의 애들을 왜 키우느냐고 나무랐고, 친아들들은 투정만 부렸다. 마을 사람들은 '주워온 아이들'하며 수군수군 대기까지 했다. 그럴수록 딸아이들은 의기소침해져 말이 없어졌다. 여기에 야뇨증을 앓은 막내 딸 소영이(당시 9ㆍ가명)는 밤마다 이불에 오줌을 쌌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불빨래와 씨름을 했다. 속절없이 애간장이 타들어갔다.
"파김치가 돼 들어와 집안일을 챙길 때, 모두가 귀찮았어요. 무엇보다도 큰 딸아이 일기장을 우연히 보게 되면서 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오빠와 남동생은 사랑하니까 손찌검하고, 우리는 미워하니까 혼내지도 않는다'는 글귀를 보고 암담했죠. '내가 딸들을 남으로만 생각해왔나.'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었죠."
생각해보고 또 생각해봐도 그런 것은 아니었다. 눈치 보는 딸아이들의 기를 살려주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이 주사보는 이후 딸들에게도 매를 들었다. 잘못할 때면 종아리를 가차 없이 때렸고, 미워할 정도로 집안일도 매몰차게 시켰다.
그렇게 억척스레 두 딸을 키운 지 12년이 되던 어느 날. 이 씨는 한 통의 짧은 편지를 받았다. 좀처럼 말이 없던 큰 딸 미영이(가명)가 서울에서 보낸 편지였다.
"첫 월급을 탔다고 미영이가 내복을 챙겨 보내왔어요. 그리고 이런 말을 함께 적어 보냈더라고요. '한때 엄마를 이유 없이 미워했지만, 이제는 달라졌어요. 저도 엄마처럼 살고 싶어요.'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어요. 학교가 파하면 늘 부모의 산소 곁으로 가 울었던 미영이가 어엿한 사회인이 됐다며 월급을 통째로 보내왔으니. 그날 밤, 큰 딸의 급여봉투를 부여잡고 잠이 들었지요."
16년을 한결 같이 아이들과 함께 해온 이 씨. 큰 딸 미영 씨(25)를 한의원 조무사로, 작은 딸 소영 씨(22)를 경북대 치대생으로 키워냈다. 자기 자식도 부모도 버리는 이 시대에 왜 이 씨는 이 길을 꿋꿋이 걸어왔을까? 사실 남의 부모, 자식을 챙긴다는 것이 결코 싶지 않을 일이었을 텐데. 이 씨의 모진 결심은 지난 82년 공직에 입문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장애인들을 돌보는 이 씨의 손길에는 자비의 따스함이 스며있다.
이 씨는 장흥군 보건소 업무를 맡게 되면서 군내 독거노인과 장애인들의 '아들ㆍ딸'이 됐다. 시간 날 때 마다 찾아가 말벗이 되고, 혈압ㆍ당료 체크와 영양제를 놔주었다. 또 네 아이들과 휴일이면 집안일을 해주는 것은 물론 틈틈이 장보기, 은행일도 대신 봐주며 이들의 '손발' 역할을 해왔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어요. 어떻게든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에요. 시어머니 상을 당한 장애인 며느리가 어린 자식들과 장례도 못 치르고 있는데, 뒷짐만 지고 있을 수 없었어요. 또 혼자 사는 뇌성마비 장애인의 힘겨운 살림살이에 고개를 돌릴 수가 있었겠어요?"
그렇게 이 씨는 강산이 두 번 바뀔 시간 동안 늘 독거노인과 장애인들과 함께 했다. 고마움의 표시로 꼬깃꼬깃 쌈짓돈을 집어주던 관산읍 김 할아버지, 알사탕을 까주던 장흥군 뇌성마비 장애인 오 할머니가 모두 자신의 아버지ㆍ어머니라고 말했다. 때문에 이 씨는 지금껏 해온 모든 것들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고 했다.
"그래도 빠듯한 월급, 바쁜 직장생활에 힘들었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도 이 주사보는 "아니다"라고 단언한다. 또 "그간의 선행으로 11월 18일 정부로부터 청백봉사상을 받게 돼 축하드린다"고 해도, 연신 손사래만 쳤다. 대신 이 씨는 이 말을 던졌다.
"제 화두가 뭔지 아세요? '어떻게 살다 갈 것인가' 이에요. 30년 전, 불교로 개종해 불법과 인연을 맺게 되면서 갖게 됐죠. 언제나 스스로에게 '사람답게 잘 살고 있어?' 라고 묻고 답해요. 그러면 무지한 나를 일깨워주고, 내가 잘 살아가고 있는가를 늘 점검할 수 있게 해주죠. 그렇게 자문자답하다보면, 길이 보여요. 엄마, 며느리, 직장인, 아내, 불제자로서 해야 할 일들이 구체적으로 눈앞에 펼쳐지거든요. 저는 다만 보이는 그대로 했을 뿐이에요."
20살에 불교로 개종, 28살부터 시작한 독거노인과 장애인 가정 방문, 38살에 두 여자 아이의 입양, 그리고 10년 전부터 벌여온 불교계 복지단체 후원금 지원과 불우이웃 장학금 전달, 최근에는 자신의 공무원공제연금을 해약해 수행원찰 장흥 묘덕사에 3천만 원을 선뜻 보시했던 것도 이런 믿음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씨는 이 모두가 삶의 화두를 그때그때 실천한 과정이었다고 강조했다. 또 '내가 했다'는 생각이 아예 머리 속에서 없다고도 했다.
그런 이 씨에게 요즘 고민이 하나있다. 관산보건지소 인근에 사는 뇌성마비 장애인 황춘덕(52) 씨를 집으로 데려올지 말지 결심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도 거동도 못하는 황 씨가 늘 마음에 걸리지만, 정작 이 씨는 지금 허리디스크로 제대로 치료도 못 받고 있다.
"춘덕 씨한테 그랬어요.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함께 살든 못 살든 곁에 있겠다고 말이죠. 그리고 농담 삼아 이렇게 말했죠. '죽었다면 땅에 묻어주고, 오라면 올테니 걱정 말라'고요. 그랬더니 춘덕 씨가 웃더군요."
인생의 전부가 불교라는 이 씨. 모든 삶 자체가 마음에서 있다는 믿음으로 인생을 산다는 이 씨는 '지금 이 순간, 여기서' 이웃과 가족들에게 행복을 느낀다고 말했다.
장흥/글=김철우 기자, 사진=고영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