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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의사를 구출하려면 결사대를 조직하자
- 작성일
- 2018.08.03 13:03
- 등록자
- 안OO
- 조회수
- 1222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애국계몽운동가이자 언론인이며, 민족주의사상가이자 역사학자이며, 민중혁명가였다. 딱히 어느 한 범주에 넣어 그를 규정하기가 어렵다. 그만큼 모든 방면에서 전면적으로 그리고 치열하게 자신을 불사르면서 일제강점기를 살다가 조국의 제단에 백골까지 헌납한 인물이다.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1936년 여순감옥에서 순국할 때까지 선생은 털끝만큼의 타협도 없이 오로지 민족해방전선에서 전투적 독립운동 노선을 철저하고 꿋꿋하게 견지했다. 선생의 노선은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간교한 침략정책하에서 어떤 타협주의도 배격한다. 선생은 민족해방전쟁에 어떤 외세의 힘도 빌려선 안된다고 하였거니와, 일정한 민족역량을 비축하기까지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유예하자는 부르주아적 교양주의도 단연 거부했다. 일제강점기를 통해 가장 직접적이고 주체성 있는 민족운동 지도자 및 사상가를 든다면 선생이야말로 단연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에게서 진정 ‘껍데기는 가라’였다.
선생이 1908년〈독사신론〉을 저술하여 한국의 근대 민족주의사학을 성립한 이래 우리의 역사학에서 중세적 역사관이 극복되고 근대적 역사관이 뚜렷하게 수립됐으며, 일제의 식민주의사관에 대한 비판과 함께 반제국주의적 민족주의사관이 정립되었다. 특히 그의『조선혁명선언』은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할 정도로 격렬하면서도 논리정연한 혁명이론을 담은 당대의 명문이었다.김원봉장군의 의열단
지침서이며 성격규정을 한『조선혁명선언』에서 더욱 주목할 것은 ‘민족’ 주체의 민족주의사상 속에서 ‘민중’ 주체의 민족주의사상으로 선생의 역사의식이 한 단계 뛰어오른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처단의거 소식을 통신으로 접수한 신채호와 사원들은 사내에서 축하연을 베풀었다. 막걸리를 곁들였다. 신채호는 목이 메어 술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신문 인쇄를 마친 후여서 다음날 신문에 하얼빈의 전보로 “이등 총마졌다” 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처음으로 국내에 의거 소식을 알렸다.
<대한매일신보>는 유일하게 <이등 살해한 이유>, <안중근ㆍ우덕순 양씨의 심문에 대한 답변> 등 관련 기사를 매호마다 실었다. 이에 반해 <황성신문>과 <대한민보>는 안 의사를 ‘흉도’라고 매도하고, <황성신문>은 <조위이공(弔慰尹公)>이라는 기사에서 이토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황성신문>은 <시일야방성대곡>으로 한때 정간되었다가 풀린 후 통감부에 코가 꿴 것인지, 친일배족지로 전락한 것이다.
안중근의 거룩한 의거 후 국내에서 벌어진 일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그야말로 ‘참사’였다. 잔명이 얼마 남지 않은 임금 순종은 의거 후 “세계대세와 조선의 국시(國是)를 알지 못하고 일본의 성의를 오해하고 생긴 ‘일대한사(一大恨事)’라고, 한심하기 그지없는 <조칙>을 발표했다. 순종은 이어서 이토는 “동양평화의 유지자이자 조선개발의 ‘일대은인’이라고 평가하였다. 제정신이 아닌 군주였다. 이런 군주의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면 기적일 것이다.
‘10ㆍ26사태<이등박문과 다까끼 마사오가 죽은날이 동일하다>로 매국노와 장귀들이 때를 만난 듯이 설쳐댔다. 이참에 아첨할 기회를 찾아 마치 여름철 장작불가에 모이는 부나미 꼴이었다. 일본에 조문사절단 파견, 이토 추모집회ㆍ이토 송덕비 건립 등이 진행되고, 추모집회에는 순종이 직접 참석한 것은 물론 유족에게 거액의 조의금을 보내었다. 일진회의 망동은 필설로 형언키 어려울 지경에 이르렀다.
조야가 온통 미쳐 날뛰는 형국이었다. 위로는 임금부터 대신들, 그리고 수많은 유생들이 원수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하느라, 1909년이 저물녘 조선사회는 야만성의 극치를 보였다.
신채호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뤼순감옥에 갇힌 안 의사를 구출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을 거듭하였다. 30의 나이에 적괴를 처단하고 당당하게 그 이유를 밝히고, 인류의 지성사에 유례가 드문 동양평화론을 제시한 안중근 의사를 신민(新民)의 영도자로 추대하고 싶었다.
“안중근을 구출하자, 결사대를 조직하여 뤼순감옥을 폭파하고 한민족의 영도자로 내세워 국권을 회복하자….”
어떻게 해서든지 그를 구출하고 싶었다.
신채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신민회 청년들에게 역설하였다.
“현실에서 도피한 자는 은사(隱士)이며, 굴복하는 자는 노예이며, 격투하는 자는 전사(戰士)이니, 우리는 이 삼자 중에서 전사의 길을 택해야 한다.”
전사가 되는 길은 쉽지가 않았다. 신민회의 믿을만한 사람들과 상의하였다. 뜻에는 흔쾌히 동의하지만 ‘어떻게’에 부닥치면, 실행에서 진척이 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천추의열 안중근을 왜적의 손에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신채호는 애간장이 탔다. 하지만 그는 선비이고 지사일지언정 투사는 아니었다. 총 한 자루, 폭탄 하나 구할 수 없었다.
신채호는 옛부터 ‘문약’하다는 평이 따르는 문인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분노의 한을 삭여 <철퇴가>란 시 한 편을 지었다.
철퇴가
박물관 돌 다들어
창해력사의 쓰고 남은 철퇴
한 번 구경하고 나니
잠겼던 기력이 번쩍 나고 숨었던 사상(思想)이 절로 난다
저 철퇴를 번쩍 들고
박랑사중(博浪沙中) 들어가서
진시황이 타고 앉은 정거(正車)를
와지끈 퉁탕 부수고
분골쇄신한 후에
천하사(天下事)를 대정(大定)하여
우리 한국의 국위국광(國威國光)을
만고 역사상에 빛내며 자고로
회포를 펴지 못하고
목적은 달(達)치 못한
고점리 형가 배(輩)의 천추 원혼을
위로코자.
여기서 나오는 ‘창해력사’는 진시황이 탄 수레를 습격했던 우리나라 사람이다. 신채호는 안중근을 구출하지 못한 처지를 창해력사에 비유한 것이다. 창해력사가 쓰고 남은 철퇴로 일제는 물론 무능한 순종과 매국노들, 장귀들의 머리통을 갈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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