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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수길, 이등박문, 아베의 DNA
- 작성일
- 2019.07.25 10:05
- 등록자
- 안OO
- 조회수
- 482
임진왜란과 일제강점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토착왜구들과 친일매국노들의 처단에 실패했기에 아직도 그들은 대한민국의 주류로 남아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기득권으로 살고있기 때문이다.그기반하에 지금벌어지고 있는 아베신조의 경제침탈 도발은 예전의 조선강점 식민지 향수가 진하게 묻어나는 또 하나의 침략전쟁 수행중이다.
다 아시다 시피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대륙진출을 한다는 이유로 왜놈들이 조선땅을 짓밟은 국토유린과 민중의 삶을 파괴한 극악무도한 사건이다.인명의 손상, 전답의 황폐화, 문화재 소실, 국위 추락, 통치체제 와해 등 막대한 피해가 뒤따랐기에 7여년 전쟁기간의 임진왜란은 반만년 민족사에서 당했던 천여 회의 외침 중에서도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전쟁이다.전쟁을 대비할 두번의 기회를 잡았으나 이를 무시한 조선왕조와 부패한 기득권세력,임진왜란이 발발하기 9년 전인 1583년 병조판서 율곡 이이(栗谷 李理)는 국방력 강화를 위해 시무육조(時務六條)를 개진했는데 그 주요 내용은 인재를 등용하고, 재용(財用)을 늘리며, 병사를 기르고, 국경 방어를 강화하며, 전마를 확충하고 백성을 교화하자는 것이다.
이이는 이 상소문의 서두에 “옛말에 먼저 적이 나를 이기지 못하도록 대비한 다음에 적을 이길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라고 하였는데, 지금 우리나라는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어 적이 오면 반드시 패하게 되어 있습니다(古語有之, 先爲不可勝, 以待敵之可勝, 今之國事, 無一可恃, 敵至必敗).”라며 양병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하지만 이 논의는 당색이 달랐던 동인(東人) 대신들의 반대와 같은 서인(西人)들의 무시로 사장되었다.
이후 전국통일(戰國統一)을 달성한 일본은 노골적인 대외팽창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1590년 조선통신사를 파견해 전쟁 준비의 정황을 파악했으나, 당쟁과 아울러 전쟁준비에 따르는 당장의 어려움을 감수하기 싫었던 조정은 전쟁이 없을 것이라 결론지었다.
물론 이러한 결론에는 일본에 대한 오래된 멸시, 혹은 과소평가 또한 영향을 미쳤다.선조와 조정은 도망쳤으나 전쟁의 고통은 민중에게
고스란히 떠 넘겨 졌다. 특히 정유재란 때 남원전투에서 수많은 조선인의 코를 베어다 묻은 코무덤이 일본 교토에 있는데 그들이 이를 왜곡하여 귀무덤이라고 하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일본인 유학자 하야시 라잔이 "잔인하니 귀무덤이라고 부르자"고 한 데서 시작된 이 왜곡을 우리 한국인들도 그대로 따라 부른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코무덤의 100M후방에는 전쟁미치광이 풍신수길의 신사가 자리하고 있다.
히데요시는 당시 부하들의 전투를 독려하려고 코를 베게 한 것인데 그자는 코를 바친 부하들에게 코영수증을 발행하고, 코감사장까지 써준 흉악범이었다. 그렇게 벤 코를 2,000개씩 상자에 담고 소금에 절여 가져갔다고 하는데 히데요시는 이를 일일이 세기까지 했다고 하고 마치 은혜를 베풀 듯 불쌍해서 묻어주었다고 코무덤 앞 비석에 뻔뻔스럽게 써놓았다.특히 전남에서 베어간 코의 숫자가 19695개로 가장 많은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한다.
임진왜란, 동학전쟁 ,일제강점기,3.1독립만세등 일본이 한국에 입힌 피해
1. 왜구들의 약탈로 인한 인명피해 + 재산피해 (100 년 ~ 근대까지)집계조차 안됨
2. 임진왜란, 정유재란 인명피해 (1592년 ~ 1598년)
사망자만 '30여 만 명' (그 중 12만명의 코와 귀가 잘려나감)재산피해는 집계조차 안 됨
3. 을미사변 - 명성황후시해사건 (1895년)
- 일국의 '왕비'를 능지처참(팔, 다리, 머리를 모조리 잘라 죽임) 후 석유를 뿌려 태워버림
4. 3.1 만세운동 (1919년)
- (일본측 발표)사망자만 '7600여 명'
- 일본이 발표하지 않은(즉, 진짜 사망자는) 집계조차 안 됨.
5.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1923년)
사망자 '6000여 명'
(아무 이유없이, 그냥 길다가 끌려서 돌에 맞아 죽고 죽창에 찔려죽고, 집에서 자다가 총으로 난사되어 죽은 사람들)
관동대학살은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생함으로써 일본 사회가 극도로 혼란 스러워지자,이를 수습하기 위해 일본정부가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퍼뜨려 조선인들을 무참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일본정부는 지진으로 인한 혼란에 정신적 불안까지 겹치면 상황이 더 악화될 것이라 보고 일본인들의 불만이 터져나올 것이라 생각,
따라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켜 우물에 독약을 넣고 부녀자를 강간한다”는 거짓소문을 퍼뜨려
일본인들의 불만이 터져나올 것이라 생각,일본인들의 위기의식을 조성한 후 계엄령을 선포하였다.새로 발견된 자료에는 23058명으로 밝혀졌다.
6. 위안부
- 피해자 '20여 만 명' (이 중 '성노예'로 종사한 사람만 '최소 3만명')
(간호부 모집, 공장노동자 모집이란 글에 솎아서 갔다는 증언과, 그것을 증명하는 일본측 문서가 나왔음에도 일본은 부인 중
7. 731부대 생체실험-마루타 (1932년 ~ 미확인)
- 피해자 (한중 합쳐) '40여 만 명'
- 세균병기와 화학병기를 실험하기 위해 각종 세균과 화학물질을 투약한 시험부터,
소총을 테스트한다고 산 사람을 세워두고 사격하는 경우까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많은 사람을 죽이고 많은 것을 노략질해 간 그들이 아직도 반성과 사죄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8.동학농민군은 조선관군<베틀링기관총>과 최신 무기<무라다 소총>로 무장한 일본군<200명>에게 논산과 공주 간의 길목인 우금치의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만다.전투가 아니라 일방적 학살이었다. 동학농민군은 계속 항전했지만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패퇴했다. 전봉준은 순창에서 재기를 꾀하던 중 배반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다음해 3월에 동료들과 함께 처형되었다.동학마지막 장흥석대들 전투에서도 3만의 동학군이 항전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감했다.
이로써 1년 이상 지속되던 동학 농민 운동은 30~40만의 인명피해와 재산 손실을 초래한 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9.일제강점기 양민학살및 독립군피해<공식적 집계 불가능>
징용,학병,근로정신대,일본군성노에는 파악조차 못하고 있고 그나마 1965년 굴욕적 한알협정때 103만 2684명에 대한 청구자금 3억
6400만 달러의 배상을 요구했다는 수치만 남았을 뿐이다.국민3명중1명은 직접피해와 죽임을 당했다는 외국유력 언론의 주장도 있음을 상기 시키고자 한다.
내재적 발전론및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일제강점을 옹호하는 매국노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지금 그들은 아직까지도 "그땐 그랬어"라고 하며 친일매국행위를 당연시하며 아베신조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으니 이게 나라냐는 촛불정신이 다시 활활 타올라 새로운 반민특위와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해야 할것임을 강조하면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는 단재 신채호선생의 가르침이 더 뼈때리는 습한 아침이다.
민원신청 /물축제 기간중에 가볼 만한곳에 안중근사당 해동사와 동학기념관이 빠져 있다.이번 물축제가 단순히 폭염을 날려버리는것
뿐 만 아니라 아직도 대한민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여기는 아베신조의 경제 침탈에 대한 경고성 역사탐방도 곁들여야 한다. 그래야 자라나는 우리후세대들에게 의향장흥을 알려서 재방문이 이뤄질것이 아닌가. 안중근평화 사상과 동학의 척양척왜 보국안민,인내천민주사상을 알리는것이 극일이고 항일이며 정의의 실천이기에 더욱 중요하다.
안의사의 의거현장과 동학군의 전투모습<장태장군>을 대형 걸개그림으로 제작해달라는 제안을 했으나 답을 듣지 못했다.일제의 도발이 발진한 오늘의 시대정신은 정의와 평화이다.이시대정신에 가장 걸맞는 고을이 의향장흥 아닌가 묻고자 한다.
구석기수도 신북에서 반민특위 안명규
토착왜구들과 친일매국노들의 처단에 실패했기에 아직도 그들은 대한민국의 주류로 남아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분야에서 기득권으로 살고있기 때문이다.그기반하에 지금벌어지고 있는 아베신조의 경제침탈 도발은 예전의 조선강점 식민지 향수가 진하게 묻어나는 또 하나의 침략전쟁 수행중이다.
다 아시다 시피 임진왜란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대륙진출을 한다는 이유로 왜놈들이 조선땅을 짓밟은 국토유린과 민중의 삶을 파괴한 극악무도한 사건이다.인명의 손상, 전답의 황폐화, 문화재 소실, 국위 추락, 통치체제 와해 등 막대한 피해가 뒤따랐기에 7여년 전쟁기간의 임진왜란은 반만년 민족사에서 당했던 천여 회의 외침 중에서도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전쟁이다.전쟁을 대비할 두번의 기회를 잡았으나 이를 무시한 조선왕조와 부패한 기득권세력,임진왜란이 발발하기 9년 전인 1583년 병조판서 율곡 이이(栗谷 李理)는 국방력 강화를 위해 시무육조(時務六條)를 개진했는데 그 주요 내용은 인재를 등용하고, 재용(財用)을 늘리며, 병사를 기르고, 국경 방어를 강화하며, 전마를 확충하고 백성을 교화하자는 것이다.
이이는 이 상소문의 서두에 “옛말에 먼저 적이 나를 이기지 못하도록 대비한 다음에 적을 이길 수 있는 기회를 기다리라고 하였는데, 지금 우리나라는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어 적이 오면 반드시 패하게 되어 있습니다(古語有之, 先爲不可勝, 以待敵之可勝, 今之國事, 無一可恃, 敵至必敗).”라며 양병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하지만 이 논의는 당색이 달랐던 동인(東人) 대신들의 반대와 같은 서인(西人)들의 무시로 사장되었다.
이후 전국통일(戰國統一)을 달성한 일본은 노골적인 대외팽창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1590년 조선통신사를 파견해 전쟁 준비의 정황을 파악했으나, 당쟁과 아울러 전쟁준비에 따르는 당장의 어려움을 감수하기 싫었던 조정은 전쟁이 없을 것이라 결론지었다.
물론 이러한 결론에는 일본에 대한 오래된 멸시, 혹은 과소평가 또한 영향을 미쳤다.선조와 조정은 도망쳤으나 전쟁의 고통은 민중에게
고스란히 떠 넘겨 졌다. 특히 정유재란 때 남원전투에서 수많은 조선인의 코를 베어다 묻은 코무덤이 일본 교토에 있는데 그들이 이를 왜곡하여 귀무덤이라고 하는 것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일본인 유학자 하야시 라잔이 "잔인하니 귀무덤이라고 부르자"고 한 데서 시작된 이 왜곡을 우리 한국인들도 그대로 따라 부른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코무덤의 100M후방에는 전쟁미치광이 풍신수길의 신사가 자리하고 있다.
히데요시는 당시 부하들의 전투를 독려하려고 코를 베게 한 것인데 그자는 코를 바친 부하들에게 코영수증을 발행하고, 코감사장까지 써준 흉악범이었다. 그렇게 벤 코를 2,000개씩 상자에 담고 소금에 절여 가져갔다고 하는데 히데요시는 이를 일일이 세기까지 했다고 하고 마치 은혜를 베풀 듯 불쌍해서 묻어주었다고 코무덤 앞 비석에 뻔뻔스럽게 써놓았다.특히 전남에서 베어간 코의 숫자가 19695개로 가장 많은것을 우리들은 알아야 한다.
임진왜란, 동학전쟁 ,일제강점기,3.1독립만세등 일본이 한국에 입힌 피해
1. 왜구들의 약탈로 인한 인명피해 + 재산피해 (100 년 ~ 근대까지)집계조차 안됨
2. 임진왜란, 정유재란 인명피해 (1592년 ~ 1598년)
사망자만 '30여 만 명' (그 중 12만명의 코와 귀가 잘려나감)재산피해는 집계조차 안 됨
3. 을미사변 - 명성황후시해사건 (1895년)
- 일국의 '왕비'를 능지처참(팔, 다리, 머리를 모조리 잘라 죽임) 후 석유를 뿌려 태워버림
4. 3.1 만세운동 (1919년)
- (일본측 발표)사망자만 '7600여 명'
- 일본이 발표하지 않은(즉, 진짜 사망자는) 집계조차 안 됨.
5.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1923년)
사망자 '6000여 명'
(아무 이유없이, 그냥 길다가 끌려서 돌에 맞아 죽고 죽창에 찔려죽고, 집에서 자다가 총으로 난사되어 죽은 사람들)
관동대학살은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생함으로써 일본 사회가 극도로 혼란 스러워지자,이를 수습하기 위해 일본정부가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소문을 퍼뜨려 조선인들을 무참하게 학살한 사건이다.
일본정부는 지진으로 인한 혼란에 정신적 불안까지 겹치면 상황이 더 악화될 것이라 보고 일본인들의 불만이 터져나올 것이라 생각,
따라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켜 우물에 독약을 넣고 부녀자를 강간한다”는 거짓소문을 퍼뜨려
일본인들의 불만이 터져나올 것이라 생각,일본인들의 위기의식을 조성한 후 계엄령을 선포하였다.새로 발견된 자료에는 23058명으로 밝혀졌다.
6. 위안부
- 피해자 '20여 만 명' (이 중 '성노예'로 종사한 사람만 '최소 3만명')
(간호부 모집, 공장노동자 모집이란 글에 솎아서 갔다는 증언과, 그것을 증명하는 일본측 문서가 나왔음에도 일본은 부인 중
7. 731부대 생체실험-마루타 (1932년 ~ 미확인)
- 피해자 (한중 합쳐) '40여 만 명'
- 세균병기와 화학병기를 실험하기 위해 각종 세균과 화학물질을 투약한 시험부터,
소총을 테스트한다고 산 사람을 세워두고 사격하는 경우까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많은 사람을 죽이고 많은 것을 노략질해 간 그들이 아직도 반성과 사죄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8.동학농민군은 조선관군<베틀링기관총>과 최신 무기<무라다 소총>로 무장한 일본군<200명>에게 논산과 공주 간의 길목인 우금치의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만다.전투가 아니라 일방적 학살이었다. 동학농민군은 계속 항전했지만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패퇴했다. 전봉준은 순창에서 재기를 꾀하던 중 배반자의 밀고로 체포되어 다음해 3월에 동료들과 함께 처형되었다.동학마지막 장흥석대들 전투에서도 3만의 동학군이 항전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마감했다.
이로써 1년 이상 지속되던 동학 농민 운동은 30~40만의 인명피해와 재산 손실을 초래한 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9.일제강점기 양민학살및 독립군피해<공식적 집계 불가능>
징용,학병,근로정신대,일본군성노에는 파악조차 못하고 있고 그나마 1965년 굴욕적 한알협정때 103만 2684명에 대한 청구자금 3억
6400만 달러의 배상을 요구했다는 수치만 남았을 뿐이다.국민3명중1명은 직접피해와 죽임을 당했다는 외국유력 언론의 주장도 있음을 상기 시키고자 한다.
내재적 발전론및 식민지근대화론으로 일제강점을 옹호하는 매국노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지금 그들은 아직까지도 "그땐 그랬어"라고 하며 친일매국행위를 당연시하며 아베신조의 주장에 동조하고 있으니 이게 나라냐는 촛불정신이 다시 활활 타올라 새로운 반민특위와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해야 할것임을 강조하면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는 단재 신채호선생의 가르침이 더 뼈때리는 습한 아침이다.
민원신청 /물축제 기간중에 가볼 만한곳에 안중근사당 해동사와 동학기념관이 빠져 있다.이번 물축제가 단순히 폭염을 날려버리는것
뿐 만 아니라 아직도 대한민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여기는 아베신조의 경제 침탈에 대한 경고성 역사탐방도 곁들여야 한다. 그래야 자라나는 우리후세대들에게 의향장흥을 알려서 재방문이 이뤄질것이 아닌가. 안중근평화 사상과 동학의 척양척왜 보국안민,인내천민주사상을 알리는것이 극일이고 항일이며 정의의 실천이기에 더욱 중요하다.
안의사의 의거현장과 동학군의 전투모습<장태장군>을 대형 걸개그림으로 제작해달라는 제안을 했으나 답을 듣지 못했다.일제의 도발이 발진한 오늘의 시대정신은 정의와 평화이다.이시대정신에 가장 걸맞는 고을이 의향장흥 아닌가 묻고자 한다.
구석기수도 신북에서 반민특위 안명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