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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줄이 똑바르면 누가 감히 바르지 않을까.
- 작성일
- 2019.08.02 09:57
- 등록자
- 안OO
- 조회수
- 956
중국 역사상 4대 명재상으로 손꼽히는 명나라 장거정(張居正·1525~1582)은 황제 만력제의 스승이자 수보(首輔), 즉 수석 대학사를 맡아 명말(明末)의 부패한 공직 사회와 맞서 싸우며 대대적 개혁을 단행했다. 대외적으로는 몽골인의 남침을 막았고, 동북지방 건주위를 이성량으로 하여금 토벌하게 하였으며, 서남지방 광시의 야오족 · 좡족을 평정했다. 대내적으로는 대규모의 행정정비를 단행, 궁정의 낭비를 억제하고, 황허강의 대대적인 치수공사를 완성시켰다.
중국 명·청대 정치사회경제사에서 장거정이 시대와 소통하는 개혁안을 제시한 점을 성공의 비결로 꼽는다. 예를 들어, 그는 당시로선 혁신적인 '농상병중(農商幷重)'의 현실적 사고방식과, 세금을 간소화하고 일원화한 '일조편법'을 도입해 조세 제도를 근대화했다. 덕분에 백성들은 온갖 잡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반면 기득권관료들은 구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관료들의 복지부동이 천하의 가장 큰 질병이어서, 모든 것은 인재(人災)와 관재(官災)'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명황제 신종 만력제(神宗 萬曆帝, 1563~1620)는 누구인가. 임진왜란이 벌어질 당시 명의 황제이고 이름은 주익균(朱翊鈞)이다. 1572년 즉위한 직후 재상 장거정(張居正)을 신임하여 사회경제적으로 중흥의 치적을 남겼다. 1592년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했을 때, 분분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는 결단을 내렸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그를 가리켜 ‘고려 황제’로, 그가 조선에 베푼 은혜를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 부르며 숭앙하는 기운이 높아졌다. 이후 정무를 팽개치고 자신의 개인 금고를 채우는 데 몰두하여 명의 멸망을 재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명나라 황제 만력제는 어린 나이에 황제에 올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입장 이었다. 누군가 대리 국무처리를 해야 했는데, 만력제의 스승 장거정이 나타나므로 명나라를 70년 연장을 이루게 된것이다.
사실 명나라는 이미 부패할 대로 부패한 상태였는데, 일단 대외 적으로는 주변 국가들의 공격이 끊임 없었고, 내부로는 부정부패와 갈등이 심화된 상태 였다.
때문에 언제든지 국가가 망해도 전혀 이상할게 없는 상태에서 나타난 개혁가 명재상 장거정, 그러나 장거정은 개혁과 노력을 하였지만, 막판 장거정이 죽은 후 엄청난 비밀이 밝혀졌으니, 재산을 남몰래 너무나 많이 부정축재 했던 것이다.
그 재산도 어마어마 해서 이를 보고 가장 분노했던 인물은 바로 그의 주인이면서 반대로 제자였던 황제만력제였다.
이 사건을 통해 만력제는 장거정의 모든 재산을 몰수 하고, 가족들까지 멸족시켰는데 그이유는 이렇다. 장거정은 만력제 수하의 재상
이었지만, 사실 만력제는 장거정의 말 이라면 죽는 시늉도 할 정도로 오금을 펴지못했다고 한다. 즉 직책은 위에 있지만, 겁을 먹고 산것이고 그래서 만력제는 장거정에게 잘 보여야 된다는 강박관념과 더불어 그를 잘 다스려야 하지만 지시할수는 없는 어려운 입장에서 항상 정치를 해왔던것이다.
그런데 죽고 나니 청렴한 것 처럼 보였던 정말 완벽해 보였던 장거정이 더러운 짓을 많이 했다는걸 알게 된 순간 배신감에 만력제가 거의 폭발 해서 장거정과 관련된 모든것을 제거한것이다.죄없는 내시와 궁녀1000여명을 죽였다고도 한다.
그런데 좀 어이가 없는건 만력제는 그 충격으로 인해서 그가 죽는 날 까지 일을 하지 않았다. 국정을 위해서는 황제의 결제가 필요 하고 점검과 관리가 필요한데 어처구니 없게 점검및 관리를 수십년간 하지 않았다고 하니 나라가 돌아가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임진 왜란이 일어나 군력이 소모되었고 이미 국가 내부적으로도 다양한 문제들이 산적했으며 특히나 이자성의 난과 훗날 청나라가 만들어 지는 누루하치의 등장은 명나라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것으로 역사가들은 적고 있다.
반면에 장거정은 죽은 후 적폐로 내몰렸지만 역설스럽게 개혁과 제도정비의 혁신가였고 리더십과 처세학에서도 거의 완벽했다.
능란한 처세술로 政敵인 고공과 태감 풍보를 일거에 무너뜨리고 권력을 쟁취했고 또한 이 권력을 10년 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각 수장으로서의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每事에 무거운 사람이었다. 입도 무겁고, 생각도, 행동도 무거운 사람이었다.
대신 그 무거움의 뒤에는 수많은 생각과 고뇌 고민의 흔적이 담겨 있음을 알수있다.
장거정은 임기응변에도 능했고 유연성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준비와 대비에 무결점한 철저했던 사람이다.
장거정은 ‘비가 오기 전에 우산을 준비하라’는 말을 그대로 현실정치에 대입한 재상이었다.
그는 중국을 둘러싼 사방의 국경을 정비했고, 당시로서는 많은 양인 10년 치의 양곡을 준비해 기근과 가뭄에 대비했으며 황제의 씀씀이를 줄여가면서까지 400만냥이라는 돈을 비축했다.
즉 일이 닥치고 난 뒤에 손을 쓰는 것은 아무리 빨라도 늦은 것으로 먼저 위기와 상황을 미리 앞서나가 대비하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또한 그는 제도를 마련하고 이 제도를 법으로 다스리는 것에 비중을 두었지만 무엇보다 제도를 움직이는 사람을 중시했다.
무엇을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누가 할 수 있는가?’에 改革 정책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판단했다.
자연히 자신이 검증하고 믿을 수 있는 관리들을 重用했다.
여기서 잠깐 임란 성웅 이순신장군께서 귀감을 준 인사관을 엿볼수 있는 대목을 전해보자면 충무공의 서울 건천동 동네형 유성룡이 병판 율곡이이를 만나보라고 권한다.이순신장군은 이렇게 답한다 .
같은 덕수이씨인 율곡을 만나면 자신의 인사에 영향을 끼칠수 있기에 만나지 않겠노라고 단호히 거부했다고 한다.이러하니 지금까지 우리들은 그의 정신을 받들고 숭앙하는것 아니 겠는가 반문해 보고 싶다.혈세를 받아 삶을 영위하는 공직자라면 이런걸 배우자! 배워서 남주지 말고 제발 자신의 것으로 만들자.
季康子 問政於孔子 孔子對曰 政者正也 子帥以正 孰敢不正(계강자 문정어공자 공자대왈 정자정야 자수이정 숙감부정)
계강자(季康子)가 공자(孔子)에게 정사(政事)에 대해서 묻자 공자 대답(對答)하기를 “정사란 것은 바르게 해야 한다.
그대가 바르게 함으로써 거느리면 누가 감히 바르지 못하겠는가.”
장흥군이 인사문제로 시끌벅적하다.주권자인 군민의 편안한 삶을 챙기는 군청조직의 안정을 위해 公明正大한 인사가 필수인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기본이다.
여러가지 고민이 있었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대중이 고개를 끄덕이는 인사가 가장 잘 한 인사일 것이다.
다시는 이런 荒唐無稽한 잡음 없이 유유히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탐진강물에게 배우라고 전해본다.오직 바다<주권자>를 향해 아무런 시끄럼없이 흘러가는 공직의 모습이 절실한 때다.강물은 절대로 역류하지 않는다.
주권자를 위하여 心機一轉 하시라 .
구석기수도 청정장흥 신북에서 반민특위 안명규
중국 명·청대 정치사회경제사에서 장거정이 시대와 소통하는 개혁안을 제시한 점을 성공의 비결로 꼽는다. 예를 들어, 그는 당시로선 혁신적인 '농상병중(農商幷重)'의 현실적 사고방식과, 세금을 간소화하고 일원화한 '일조편법'을 도입해 조세 제도를 근대화했다. 덕분에 백성들은 온갖 잡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반면 기득권관료들은 구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관료들의 복지부동이 천하의 가장 큰 질병이어서, 모든 것은 인재(人災)와 관재(官災)'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명황제 신종 만력제(神宗 萬曆帝, 1563~1620)는 누구인가. 임진왜란이 벌어질 당시 명의 황제이고 이름은 주익균(朱翊鈞)이다. 1572년 즉위한 직후 재상 장거정(張居正)을 신임하여 사회경제적으로 중흥의 치적을 남겼다. 1592년 조선이 임진왜란을 당했을 때, 분분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는 결단을 내렸다. 이 때문에 조선에서는 임진왜란 이후 그를 가리켜 ‘고려 황제’로, 그가 조선에 베푼 은혜를 ‘재조지은’(再造之恩)이라 부르며 숭앙하는 기운이 높아졌다. 이후 정무를 팽개치고 자신의 개인 금고를 채우는 데 몰두하여 명의 멸망을 재촉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명나라 황제 만력제는 어린 나이에 황제에 올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입장 이었다. 누군가 대리 국무처리를 해야 했는데, 만력제의 스승 장거정이 나타나므로 명나라를 70년 연장을 이루게 된것이다.
사실 명나라는 이미 부패할 대로 부패한 상태였는데, 일단 대외 적으로는 주변 국가들의 공격이 끊임 없었고, 내부로는 부정부패와 갈등이 심화된 상태 였다.
때문에 언제든지 국가가 망해도 전혀 이상할게 없는 상태에서 나타난 개혁가 명재상 장거정, 그러나 장거정은 개혁과 노력을 하였지만, 막판 장거정이 죽은 후 엄청난 비밀이 밝혀졌으니, 재산을 남몰래 너무나 많이 부정축재 했던 것이다.
그 재산도 어마어마 해서 이를 보고 가장 분노했던 인물은 바로 그의 주인이면서 반대로 제자였던 황제만력제였다.
이 사건을 통해 만력제는 장거정의 모든 재산을 몰수 하고, 가족들까지 멸족시켰는데 그이유는 이렇다. 장거정은 만력제 수하의 재상
이었지만, 사실 만력제는 장거정의 말 이라면 죽는 시늉도 할 정도로 오금을 펴지못했다고 한다. 즉 직책은 위에 있지만, 겁을 먹고 산것이고 그래서 만력제는 장거정에게 잘 보여야 된다는 강박관념과 더불어 그를 잘 다스려야 하지만 지시할수는 없는 어려운 입장에서 항상 정치를 해왔던것이다.
그런데 죽고 나니 청렴한 것 처럼 보였던 정말 완벽해 보였던 장거정이 더러운 짓을 많이 했다는걸 알게 된 순간 배신감에 만력제가 거의 폭발 해서 장거정과 관련된 모든것을 제거한것이다.죄없는 내시와 궁녀1000여명을 죽였다고도 한다.
그런데 좀 어이가 없는건 만력제는 그 충격으로 인해서 그가 죽는 날 까지 일을 하지 않았다. 국정을 위해서는 황제의 결제가 필요 하고 점검과 관리가 필요한데 어처구니 없게 점검및 관리를 수십년간 하지 않았다고 하니 나라가 돌아가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임진 왜란이 일어나 군력이 소모되었고 이미 국가 내부적으로도 다양한 문제들이 산적했으며 특히나 이자성의 난과 훗날 청나라가 만들어 지는 누루하치의 등장은 명나라 멸망에 결정적 기여를 한것으로 역사가들은 적고 있다.
반면에 장거정은 죽은 후 적폐로 내몰렸지만 역설스럽게 개혁과 제도정비의 혁신가였고 리더십과 처세학에서도 거의 완벽했다.
능란한 처세술로 政敵인 고공과 태감 풍보를 일거에 무너뜨리고 권력을 쟁취했고 또한 이 권력을 10년 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각 수장으로서의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每事에 무거운 사람이었다. 입도 무겁고, 생각도, 행동도 무거운 사람이었다.
대신 그 무거움의 뒤에는 수많은 생각과 고뇌 고민의 흔적이 담겨 있음을 알수있다.
장거정은 임기응변에도 능했고 유연성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준비와 대비에 무결점한 철저했던 사람이다.
장거정은 ‘비가 오기 전에 우산을 준비하라’는 말을 그대로 현실정치에 대입한 재상이었다.
그는 중국을 둘러싼 사방의 국경을 정비했고, 당시로서는 많은 양인 10년 치의 양곡을 준비해 기근과 가뭄에 대비했으며 황제의 씀씀이를 줄여가면서까지 400만냥이라는 돈을 비축했다.
즉 일이 닥치고 난 뒤에 손을 쓰는 것은 아무리 빨라도 늦은 것으로 먼저 위기와 상황을 미리 앞서나가 대비하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또한 그는 제도를 마련하고 이 제도를 법으로 다스리는 것에 비중을 두었지만 무엇보다 제도를 움직이는 사람을 중시했다.
무엇을 하는가?’도 중요하지만 ‘누가 할 수 있는가?’에 改革 정책의 성패가 달려 있다고 판단했다.
자연히 자신이 검증하고 믿을 수 있는 관리들을 重用했다.
여기서 잠깐 임란 성웅 이순신장군께서 귀감을 준 인사관을 엿볼수 있는 대목을 전해보자면 충무공의 서울 건천동 동네형 유성룡이 병판 율곡이이를 만나보라고 권한다.이순신장군은 이렇게 답한다 .
같은 덕수이씨인 율곡을 만나면 자신의 인사에 영향을 끼칠수 있기에 만나지 않겠노라고 단호히 거부했다고 한다.이러하니 지금까지 우리들은 그의 정신을 받들고 숭앙하는것 아니 겠는가 반문해 보고 싶다.혈세를 받아 삶을 영위하는 공직자라면 이런걸 배우자! 배워서 남주지 말고 제발 자신의 것으로 만들자.
季康子 問政於孔子 孔子對曰 政者正也 子帥以正 孰敢不正(계강자 문정어공자 공자대왈 정자정야 자수이정 숙감부정)
계강자(季康子)가 공자(孔子)에게 정사(政事)에 대해서 묻자 공자 대답(對答)하기를 “정사란 것은 바르게 해야 한다.
그대가 바르게 함으로써 거느리면 누가 감히 바르지 못하겠는가.”
장흥군이 인사문제로 시끌벅적하다.주권자인 군민의 편안한 삶을 챙기는 군청조직의 안정을 위해 公明正大한 인사가 필수인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기본이다.
여러가지 고민이 있었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대중이 고개를 끄덕이는 인사가 가장 잘 한 인사일 것이다.
다시는 이런 荒唐無稽한 잡음 없이 유유히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탐진강물에게 배우라고 전해본다.오직 바다<주권자>를 향해 아무런 시끄럼없이 흘러가는 공직의 모습이 절실한 때다.강물은 절대로 역류하지 않는다.
주권자를 위하여 心機一轉 하시라 .
구석기수도 청정장흥 신북에서 반민특위 안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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