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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금방 뜨거워지고 금방 식는 나라다.DHC방송
- 작성일
- 2019.08.07 11:48
- 등록자
- 안OO
- 조회수
- 880
임진왜란에서 갈린 항왜와 순왜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항왜는 임진왜란때 조선에 스스로 항복하여 조선군에 앞장서 조총을 전수하고 조국인 일본인의 만행에 분노를 느껴 탈영한사람을 항왜라 한다.
항왜는 전쟁 당시 조선군의 전력 향상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조선에 남아 자손을 낳고 살기도 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이괄의 난에 가담하고, 거꾸로 난을 진압하는 데 활약하거나 병자호란 때 청군을 막는데 활약하기도 했다. 1593년 이후부터 투항하는 일본군이 많아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은 항왜를 살해했다. 1594년부터는 조선 조정이 항왜의 중요성을 깨닫고 항왜를 받아들이게 된다. 조선이 항왜를 받아들인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수의 일본군이 탈영하였기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영에 목책을 설치하라고 지시했을 정도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무려 1만여 명의 일본군이 조선에 투항을 해왔다고 한다.그러나 확인되지 않은 수까지 합치면 항왜의 수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김충선은 경상도 우록동에 자리를 잡고 여생을 보냈고 후손을 남겨 우록 김씨(友鹿 金氏)의 시조가 되었다.
이 외에도 검술에 능해 조선군의 훈련을 맡았고 울산성 전투에도 참가했던 여여문(呂汝文, 일본 이름은 요여문要汝文)과 함박 김씨(咸博 金氏)의 시조인 김성인(金誠仁, 일본 이름은 사여모沙汝某)이 유명하다.
1. 항왜 출신의 활약
임진왜란때 왜적왜구라면 몸서리가 쳐지고 화가 나지만 조선을위해 일본을등지고 싸웠던 일본인들이 있었다
가장 대표적 인물이 김충선[金忠善] 장군이다.
사야가[沙也加, 沙也可] 1571년( 선조4) 1월 3일 일본에서 출생 일본에서 자라고 생활했던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1592년에 처음으로 조선이라는 땅을 밟게 되었다. 가등청정, 가토 기요마사의 휘하의 선봉장으로 3,000명의 병사를 통솔하며 내침했다.그러나 그는 얼마후 조선군인으로 변해 왜적들과 싸우게 된다.
사야가는 적진의 선봉장이었기 때문에 적의 동향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그의 전공을 높이사 가선대부(嘉善大夫) 벼슬을 내렸다. 1593년 사야가의 뛰어난 전공을 인정한 도원수 권율과 어사 한준겸 등의 주청으로 성명을 하사받게 되는데, '바다를 건너온 모래를 걸러 금을 얻었다는 뜻으로 김충선이라 하였다 한다.
항왜들은 적의 사정을 정확히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조총을 비롯해 일본의 신무기 관련 기술을 전수해주는 등 곳곳에서 활약이 컸다. 보통 항왜는 전황이 좋지 못해 투항한 병사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특히, 이순신 장군의 활약에 사기가 떨어져 투항한 왜군들이 많았다고 한다.대구 달성의 우록김씨로 지금은 대를 이어가고 있으며 유신독재시절 내무장관을 지낸 김치열도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한국 영화의 흥행기록을 다시 쓴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을 돕는 일본인 무사 준사(오타니 료헤이 분)를 기억 하시는가.
준사는 역사 속에 실존인물이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준사의 이름이 나온다."항복한 왜인 준사는 안골에 있는 적진에서 투항해 온 자인데, 내 배위에 있다가 바다를 굽어보며 말하기를, '무늬 놓은 붉은 비단옷 입은 자가 바로 안골진에 있던 적장 마다시(구루시마 미치후사)입니다'고 말했다"라고 쓰인 글이 존재한다.
준사는 이순신 장군의 명을 받아 왜군에 잠입해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물론 명량 해전에 참전해 일본군과 맞서 공을 세운다. 준사를 연기하는 배우 또한 귀화한 일본 배우 오타니 료헤이로를 캐스팅해서 리얼함을 더했다.
順倭.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 부일, 협력한 조선인을 이르는 말이다. 주로 조선 정부에 대한 원한과 불만을 가졌거나 혹은 일본군의 강압에 의해 부역 행위를 한 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만 대부분이 왜군의 강요로 부득이 하게 일을 저질렀거나 생계형이었고,이들을 지키지 못한 조선 정부의 책임도 지적되었기 때문에 국경인 같은 부류가 아니라면 처벌은 거의 없거나 가벼운 편이었다고 한다.
순왜에는 3가지 부류 가 있다.
첫번째로 왜군의 '길잡이 역할'을 한 자. 즉, 왜군이 조선의 도성 한양으로 진격할 때 도성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 경우를 말한다.
두번째로 왜군에게 조선의 상황 등 정보 제공을 한 경우이다. 세번째로 왜군에 소속되어 참전한 경우 등으로 분류된다.
순왜의 대표적인 예로 임해군과 순화군을 함경도 회령부에서 포박하여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긴 국경인이 있다.
임진왜란 초기 왜군이 승기를 잡았음에도 김충선 같은 인물들이 전쟁 시작과 함께 조선군에 투항한 것을 보면 임진왜란 자체가 명분 없는 전쟁,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을 위한 전쟁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지금 이시기 1급전범 괴뢰만주국최고위관료 기시노브스케의 외손자이며 정한론의 대부 요시다 쇼인을 가장 존경한다는 아베신조,그또한 이토오히로부미와 토요토미히데요시처럼 아무런 명분없는 경제침략에 열을 올리고 있다.다시 말해 평화헌법을 무너 뜨리고 군사대국화로 대동아 공영권을 다시 획책하고 있는 중이다.의향장흥은 척양척왜 동학전쟁부터 안중근의사 사당 해동사까지 抗日역사의 최전선이다.순발력이 강하나 지구력이 약하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일본 보이코트를 길게 가져가 아베의 헛된야욕을 분쇄하는 의향장흥군민의 끈기를 발휘할 때이다.그리고 군청차원에서는 이시대 시대정신인 안중근의사의 평화사상과 사람이 하늘이라는 동학을 알리는 첨병역할을 기대하며 독려 해본다.
임진왜란때 시작한 순왜의 매국활동은 일제강점기에 최고 정점을 찍었다.31만세투쟁,임시정부수립 100년이 지닌 지금도 그들의 뜻을 받든 친일매국노들의 암약은 정치경제사회문화등에서 활발하게 현재까지도 진행중이다.특히 국회에 다수 존재하고 있다.그래서 당부드린다. 다가오는 내년 총선거에서 주권자들은 매의 눈으로 韓日戰을 치뤄 국회국산화를 달성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물축제때 동교다리에 안중근의사와 동학군의 전투장면을 대형걸개그림으로 홍보하자고 여러번 건의했다. 닭,소보듯하는 군청관계자의 불통에 머리에 쥐가 나서 약을 사먹은적도 있다.50만명의 방문객 중에 5만명만이라도 해동사와 동학기념관을 둘러보고 걸개그림을 SNS로 공유했다면 장흥군은 의향과 항일의 대명사로 우뚝서고 언론의 취재가 줄을 섰을것이다.주권자의 의견에 귀기울이지 않으면 공직에 있을 필요가 없다.면봉으로 귀 좀 후벼라 제발!!!
*사건 사고 없이 물축제에 이바지한 4만군민과 장흥군청직원및 사회단체의 수고에 감사 드립니다.
*봉오동전투<8월7일>와 김복동할머니< 8월8일>영화가 개봉합니다.많은 관람으로 왜 일본을 보이콧해야하는지 멘탈을 강화하는
시간되시길 소원합니다.
구석기수도, 해동사가 자리한 장동에서 반민특위 안명규
항왜는 임진왜란때 조선에 스스로 항복하여 조선군에 앞장서 조총을 전수하고 조국인 일본인의 만행에 분노를 느껴 탈영한사람을 항왜라 한다.
항왜는 전쟁 당시 조선군의 전력 향상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도 조선에 남아 자손을 낳고 살기도 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이괄의 난에 가담하고, 거꾸로 난을 진압하는 데 활약하거나 병자호란 때 청군을 막는데 활약하기도 했다. 1593년 이후부터 투항하는 일본군이 많아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선은 항왜를 살해했다. 1594년부터는 조선 조정이 항왜의 중요성을 깨닫고 항왜를 받아들이게 된다. 조선이 항왜를 받아들인다는 소문이 퍼지자 많은 수의 일본군이 탈영하였기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영에 목책을 설치하라고 지시했을 정도였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무려 1만여 명의 일본군이 조선에 투항을 해왔다고 한다.그러나 확인되지 않은 수까지 합치면 항왜의 수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김충선은 경상도 우록동에 자리를 잡고 여생을 보냈고 후손을 남겨 우록 김씨(友鹿 金氏)의 시조가 되었다.
이 외에도 검술에 능해 조선군의 훈련을 맡았고 울산성 전투에도 참가했던 여여문(呂汝文, 일본 이름은 요여문要汝文)과 함박 김씨(咸博 金氏)의 시조인 김성인(金誠仁, 일본 이름은 사여모沙汝某)이 유명하다.
1. 항왜 출신의 활약
임진왜란때 왜적왜구라면 몸서리가 쳐지고 화가 나지만 조선을위해 일본을등지고 싸웠던 일본인들이 있었다
가장 대표적 인물이 김충선[金忠善] 장군이다.
사야가[沙也加, 沙也可] 1571년( 선조4) 1월 3일 일본에서 출생 일본에서 자라고 생활했던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1592년에 처음으로 조선이라는 땅을 밟게 되었다. 가등청정, 가토 기요마사의 휘하의 선봉장으로 3,000명의 병사를 통솔하며 내침했다.그러나 그는 얼마후 조선군인으로 변해 왜적들과 싸우게 된다.
사야가는 적진의 선봉장이었기 때문에 적의 동향을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있었다.그의 전공을 높이사 가선대부(嘉善大夫) 벼슬을 내렸다. 1593년 사야가의 뛰어난 전공을 인정한 도원수 권율과 어사 한준겸 등의 주청으로 성명을 하사받게 되는데, '바다를 건너온 모래를 걸러 금을 얻었다는 뜻으로 김충선이라 하였다 한다.
항왜들은 적의 사정을 정확히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고, 조총을 비롯해 일본의 신무기 관련 기술을 전수해주는 등 곳곳에서 활약이 컸다. 보통 항왜는 전황이 좋지 못해 투항한 병사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특히, 이순신 장군의 활약에 사기가 떨어져 투항한 왜군들이 많았다고 한다.대구 달성의 우록김씨로 지금은 대를 이어가고 있으며 유신독재시절 내무장관을 지낸 김치열도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한국 영화의 흥행기록을 다시 쓴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을 돕는 일본인 무사 준사(오타니 료헤이 분)를 기억 하시는가.
준사는 역사 속에 실존인물이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준사의 이름이 나온다."항복한 왜인 준사는 안골에 있는 적진에서 투항해 온 자인데, 내 배위에 있다가 바다를 굽어보며 말하기를, '무늬 놓은 붉은 비단옷 입은 자가 바로 안골진에 있던 적장 마다시(구루시마 미치후사)입니다'고 말했다"라고 쓰인 글이 존재한다.
준사는 이순신 장군의 명을 받아 왜군에 잠입해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물론 명량 해전에 참전해 일본군과 맞서 공을 세운다. 준사를 연기하는 배우 또한 귀화한 일본 배우 오타니 료헤이로를 캐스팅해서 리얼함을 더했다.
順倭.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에 부일, 협력한 조선인을 이르는 말이다. 주로 조선 정부에 대한 원한과 불만을 가졌거나 혹은 일본군의 강압에 의해 부역 행위를 한 자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다만 대부분이 왜군의 강요로 부득이 하게 일을 저질렀거나 생계형이었고,이들을 지키지 못한 조선 정부의 책임도 지적되었기 때문에 국경인 같은 부류가 아니라면 처벌은 거의 없거나 가벼운 편이었다고 한다.
순왜에는 3가지 부류 가 있다.
첫번째로 왜군의 '길잡이 역할'을 한 자. 즉, 왜군이 조선의 도성 한양으로 진격할 때 도성으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역할을 한 경우를 말한다.
두번째로 왜군에게 조선의 상황 등 정보 제공을 한 경우이다. 세번째로 왜군에 소속되어 참전한 경우 등으로 분류된다.
순왜의 대표적인 예로 임해군과 순화군을 함경도 회령부에서 포박하여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긴 국경인이 있다.
임진왜란 초기 왜군이 승기를 잡았음에도 김충선 같은 인물들이 전쟁 시작과 함께 조선군에 투항한 것을 보면 임진왜란 자체가 명분 없는 전쟁,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을 위한 전쟁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지금 이시기 1급전범 괴뢰만주국최고위관료 기시노브스케의 외손자이며 정한론의 대부 요시다 쇼인을 가장 존경한다는 아베신조,그또한 이토오히로부미와 토요토미히데요시처럼 아무런 명분없는 경제침략에 열을 올리고 있다.다시 말해 평화헌법을 무너 뜨리고 군사대국화로 대동아 공영권을 다시 획책하고 있는 중이다.의향장흥은 척양척왜 동학전쟁부터 안중근의사 사당 해동사까지 抗日역사의 최전선이다.순발력이 강하나 지구력이 약하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일본 보이코트를 길게 가져가 아베의 헛된야욕을 분쇄하는 의향장흥군민의 끈기를 발휘할 때이다.그리고 군청차원에서는 이시대 시대정신인 안중근의사의 평화사상과 사람이 하늘이라는 동학을 알리는 첨병역할을 기대하며 독려 해본다.
임진왜란때 시작한 순왜의 매국활동은 일제강점기에 최고 정점을 찍었다.31만세투쟁,임시정부수립 100년이 지닌 지금도 그들의 뜻을 받든 친일매국노들의 암약은 정치경제사회문화등에서 활발하게 현재까지도 진행중이다.특히 국회에 다수 존재하고 있다.그래서 당부드린다. 다가오는 내년 총선거에서 주권자들은 매의 눈으로 韓日戰을 치뤄 국회국산화를 달성해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물축제때 동교다리에 안중근의사와 동학군의 전투장면을 대형걸개그림으로 홍보하자고 여러번 건의했다. 닭,소보듯하는 군청관계자의 불통에 머리에 쥐가 나서 약을 사먹은적도 있다.50만명의 방문객 중에 5만명만이라도 해동사와 동학기념관을 둘러보고 걸개그림을 SNS로 공유했다면 장흥군은 의향과 항일의 대명사로 우뚝서고 언론의 취재가 줄을 섰을것이다.주권자의 의견에 귀기울이지 않으면 공직에 있을 필요가 없다.면봉으로 귀 좀 후벼라 제발!!!
*사건 사고 없이 물축제에 이바지한 4만군민과 장흥군청직원및 사회단체의 수고에 감사 드립니다.
*봉오동전투<8월7일>와 김복동할머니< 8월8일>영화가 개봉합니다.많은 관람으로 왜 일본을 보이콧해야하는지 멘탈을 강화하는
시간되시길 소원합니다.
구석기수도, 해동사가 자리한 장동에서 반민특위 안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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