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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노래가 금지곡?
- 작성일
- 2019.08.20 10:11
- 등록자
- 안OO
- 조회수
- 788
아베가 촉발한 경제침략에 맞서는 민중들의 애국적이며 정의로운 행동이 불볕더위 만큼 뜨거운 8월이다.올해는 임정과 삼일만세투쟁 100년이고 광복74주년을 맞이 하는 뜻깊은 해이다.
일본은 과거 전쟁범죄에 대해 끊임없는 사죄와 반성을 해도 용서가 힘든일 인데 적반하장식 억지와 역사왜곡에 몰두하고 있다.
대한민국 전역에서 일고 있는 아베아웃과 일제불매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이시각에도 몰지각한 아베의 주장에 동조하며
우리나라에 암약하고 있는 친일매국노와 토착왜구들의 뿌리는 어디인가를 알아보는것도 큰의미가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1905년 일본은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에 찬성한 대한제국 대신은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5명이다. 이들을 을사오적이라고도 일컫는다. 특히 이완용은 을사조약 체결을 지지하고 서명을 주도했으며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후 내각총리대신이 된 을사오적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한 그는 헤이그 특사 사건 후 고종에게 그 책임을 추궁하며 순종에게 양위할 것을 강요했고 친일매국노의 역활을 경술국치까지 쭈욱 이어간다.
경술국치,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날로 기록된 1910년 그날,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추락한다.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은 남산의 통감관저에서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병합문서’에 서명했다.
1910년 8월 29일 이 조약이 공포되고 대한제국은 국권을 잃는다.
매국노의 최고봉 이완용 그는 누구인가? 실제로 우리들은 그를 잘 모르고 지나고 있다. 힘의 논리에 따라 처음에는 수구파, 다음에는 친미파, 친러파, 친일파로 변신한 지독한 처세술의 달인이다.1909년 12월 이재명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으나 회생했다. 1910년 8월 총리대신으로 내각회의를 소집하여 합병에 관한 건을 상정하고, 어전회의를 소집하여 합병안을 가결시키는 동시에 스스로 한일양국병합전권위원이 되어 데라우치의 관사로 찾아가 합병조약을 체결했다. 이완용의 비서였던 이인직.우리들은 그를 "혈의 누"라는 작품을 쓴 신소설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작가로 만 배웠다.그러나 그역시 1910년 이완용의 심복으로서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와 비밀리에 만나 한일합병이 체결되는 매개역할을 했다.경술국치의 주역이었던 것이다.
1919년 3·1운동을 비난하는 경고문과 담화를 3차례에 걸쳐 〈매일신보〉·〈경성일보〉에 발표했으며 1920년 12월 후작으로 승급했다. 1921년 중추원이 개편된 후에도 계속 중추원부의장을 지냈다. .나라가 완전히 넘어간 뒤 그 이름도 그럴듯한 조선의 귀족 65명은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다. 이완용은 일본 귀족으로 따져 넷째 자리인 백작에 은사금 1천 5백여 원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조선총독부정무총감이 의장인 중추원의 부의장이 되었다. 그는 일본과 조선이 한 몸이 되어야 한다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일본과 조선 사람의 혼혈을 주장하면서 친일행각을 벌였다. 그리하여 조선의 관료 출신으로는 민영휘와 함께 가장 많은 재산을 모은 자산가로 꼽혔다.
민씨 척족 수구파 관료출신인 민영휘가 친일파로 변신하여 일제강점기 동안 가장 재산이 많은 조선인이었고, 이완용이 2번째였다.
친일인명사전에서 확인된 바로는 이완용의 재산은 당시 돈 300만원으로, 지금 돈으로 450억원 가량 된다. 병탄 이후 벌어들인 돈이 현재 가치로 400억~450억 원이 넘으며, 이는 또한 병탄 전의 자기 일가의 재산에 비해 3배나 늘어난 것이다. 최근 그의 후손들이 땅을 찾는다고 난리법석을 부리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1945년 8월15일 주체적 해방이 아닌 강대국의 힘으로 우리나라는 일제 악마의 손아귀를 벗어났다.강점36년 동안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목숨을 건 독립투쟁이 줄을 이었으나 결정적인것은 일본패망이 우리들의 힘으로 쟁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임시정부와 건준은 미군정에 의해 철저히 무시,파괴되고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독재정권에서 친일매국노들은 득세했고 남북분단 민족상잔의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까지 우리민중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흘러간 것이다.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권에서 조차 대놓고 친일독재부역을 미화하는 토착왜구들의 준동은 멈추지 않고 있다.대일민국과 우리 일본이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국회국산화와 일본제국주의의 횡포를 분쇄할 기술독립이 필요한 싯점인 지금 다시 반민특위 부활을 요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것이다.
과거의 친일과 독재부역이 아직까지도 권력이 되고 富가 되고 되물림되는 불합리.부정의의 모순 이젠 종식시켜야 할때 아닌가?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작사 작곡한 '옥중가'를 소개 하고자 한다.
적막한 가을강산 야월삼경에
슬피 울며 날아가는 저 기러기야
북방의 소식을 네가 아느냐
여기서 저기까지 몇 리 되는지
아차차 가슴 답답 이 내 신세야
만주땅 시베리아 넓은 들판에
동에 갔다 서에 번쩍 이 내 신세야
해외에 널려있는 백두산하에
나의 일가 동포 형제 저곳 있건만
나는 소식 몰라서 답답하구나
교대 잠이 편안하여 누가 자며
콩 든 밥이 맛이 있어 누가 먹겠나
때려라 부숴라 왜놈들 죽여라.
이제 우리들이 할일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에 이식된 정신의 단절이며 일제불매운동과 더불어 일본군국주의 앞잡이로 나서며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몸부림치는 新親日賣國奴 들을 척결하는 길이다.
잊혀지고 망각하고 심지어 폄하와 왜곡으로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우리들의 진정한 독립영웅들은 진정한 해방과 자주독립을 이루지
못한 조국의 현실에 통한의 옥중가를 부르고 계신지도 모를 일이다.
장동해동사에는 고급진 액자로 군청청사에는 대형 걸개그림으로 전시하면 어떨가? 아베의 침략에 맞서는 우리국민들의 마음가짐을 다지는 가장 적합한 노랫말로 보여 장흥군에 민원을 요청한다.
안중근의사의 영혼이 깃든 장동면에서 반민특위 안명규
일본은 과거 전쟁범죄에 대해 끊임없는 사죄와 반성을 해도 용서가 힘든일 인데 적반하장식 억지와 역사왜곡에 몰두하고 있다.
대한민국 전역에서 일고 있는 아베아웃과 일제불매운동이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이시각에도 몰지각한 아베의 주장에 동조하며
우리나라에 암약하고 있는 친일매국노와 토착왜구들의 뿌리는 어디인가를 알아보는것도 큰의미가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1905년 일본은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했다. 이에 찬성한 대한제국 대신은 학부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5명이다. 이들을 을사오적이라고도 일컫는다. 특히 이완용은 을사조약 체결을 지지하고 서명을 주도했으며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 후 내각총리대신이 된 을사오적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한 그는 헤이그 특사 사건 후 고종에게 그 책임을 추궁하며 순종에게 양위할 것을 강요했고 친일매국노의 역활을 경술국치까지 쭈욱 이어간다.
경술국치, 역사상 가장 부끄러운 날로 기록된 1910년 그날, 대한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추락한다.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은 남산의 통감관저에서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와 ‘병합문서’에 서명했다.
1910년 8월 29일 이 조약이 공포되고 대한제국은 국권을 잃는다.
매국노의 최고봉 이완용 그는 누구인가? 실제로 우리들은 그를 잘 모르고 지나고 있다. 힘의 논리에 따라 처음에는 수구파, 다음에는 친미파, 친러파, 친일파로 변신한 지독한 처세술의 달인이다.1909년 12월 이재명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으나 회생했다. 1910년 8월 총리대신으로 내각회의를 소집하여 합병에 관한 건을 상정하고, 어전회의를 소집하여 합병안을 가결시키는 동시에 스스로 한일양국병합전권위원이 되어 데라우치의 관사로 찾아가 합병조약을 체결했다. 이완용의 비서였던 이인직.우리들은 그를 "혈의 누"라는 작품을 쓴 신소설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작가로 만 배웠다.그러나 그역시 1910년 이완용의 심복으로서 통감부 외사국장 고마쓰와 비밀리에 만나 한일합병이 체결되는 매개역할을 했다.경술국치의 주역이었던 것이다.
1919년 3·1운동을 비난하는 경고문과 담화를 3차례에 걸쳐 〈매일신보〉·〈경성일보〉에 발표했으며 1920년 12월 후작으로 승급했다. 1921년 중추원이 개편된 후에도 계속 중추원부의장을 지냈다. .나라가 완전히 넘어간 뒤 그 이름도 그럴듯한 조선의 귀족 65명은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다. 이완용은 일본 귀족으로 따져 넷째 자리인 백작에 은사금 1천 5백여 원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조선총독부정무총감이 의장인 중추원의 부의장이 되었다. 그는 일본과 조선이 한 몸이 되어야 한다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일본과 조선 사람의 혼혈을 주장하면서 친일행각을 벌였다. 그리하여 조선의 관료 출신으로는 민영휘와 함께 가장 많은 재산을 모은 자산가로 꼽혔다.
민씨 척족 수구파 관료출신인 민영휘가 친일파로 변신하여 일제강점기 동안 가장 재산이 많은 조선인이었고, 이완용이 2번째였다.
친일인명사전에서 확인된 바로는 이완용의 재산은 당시 돈 300만원으로, 지금 돈으로 450억원 가량 된다. 병탄 이후 벌어들인 돈이 현재 가치로 400억~450억 원이 넘으며, 이는 또한 병탄 전의 자기 일가의 재산에 비해 3배나 늘어난 것이다. 최근 그의 후손들이 땅을 찾는다고 난리법석을 부리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1945년 8월15일 주체적 해방이 아닌 강대국의 힘으로 우리나라는 일제 악마의 손아귀를 벗어났다.강점36년 동안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목숨을 건 독립투쟁이 줄을 이었으나 결정적인것은 일본패망이 우리들의 힘으로 쟁취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임시정부와 건준은 미군정에 의해 철저히 무시,파괴되고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독재정권에서 친일매국노들은 득세했고 남북분단 민족상잔의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까지 우리민중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흘러간 것이다.촛불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권에서 조차 대놓고 친일독재부역을 미화하는 토착왜구들의 준동은 멈추지 않고 있다.대일민국과 우리 일본이 이를 잘 증명해 주고 있다.국회국산화와 일본제국주의의 횡포를 분쇄할 기술독립이 필요한 싯점인 지금 다시 반민특위 부활을 요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것이다.
과거의 친일과 독재부역이 아직까지도 권력이 되고 富가 되고 되물림되는 불합리.부정의의 모순 이젠 종식시켜야 할때 아닌가?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옥에서 작사 작곡한 '옥중가'를 소개 하고자 한다.
적막한 가을강산 야월삼경에
슬피 울며 날아가는 저 기러기야
북방의 소식을 네가 아느냐
여기서 저기까지 몇 리 되는지
아차차 가슴 답답 이 내 신세야
만주땅 시베리아 넓은 들판에
동에 갔다 서에 번쩍 이 내 신세야
해외에 널려있는 백두산하에
나의 일가 동포 형제 저곳 있건만
나는 소식 몰라서 답답하구나
교대 잠이 편안하여 누가 자며
콩 든 밥이 맛이 있어 누가 먹겠나
때려라 부숴라 왜놈들 죽여라.
이제 우리들이 할일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에 이식된 정신의 단절이며 일제불매운동과 더불어 일본군국주의 앞잡이로 나서며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몸부림치는 新親日賣國奴 들을 척결하는 길이다.
잊혀지고 망각하고 심지어 폄하와 왜곡으로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우리들의 진정한 독립영웅들은 진정한 해방과 자주독립을 이루지
못한 조국의 현실에 통한의 옥중가를 부르고 계신지도 모를 일이다.
장동해동사에는 고급진 액자로 군청청사에는 대형 걸개그림으로 전시하면 어떨가? 아베의 침략에 맞서는 우리국민들의 마음가짐을 다지는 가장 적합한 노랫말로 보여 장흥군에 민원을 요청한다.
안중근의사의 영혼이 깃든 장동면에서 반민특위 안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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